☆ 마르코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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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주중 | 등록일 | 11.02.16 | 조회수 | 420 |
* 마르코니 1874. 4. 25 이탈리아 볼로냐~1937. 7. 20 로마.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라디오 전신체계(1896)의 발명가. 190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단파 무선통신 개발에 대해 연구했고 이는 거의 모든 현대 장거리 무선통신의 기초를 이루었다. 교육과 초기연구 마르코니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인이었고 어머니는 아일랜드인이었다. 볼로냐와 피렌체에서 교육받은 후 리보르노의 기술학교로 갔다. 그는 이곳에서 물리학을 공부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맥스웰의 초기 수학적 연구와 라디오파(波)를 만들어내어 전송시킨 헤르츠의 실험, 번개와 전기에 대한 연구를 한 올리버 로지 경의 실험 등을 따라서 전자기파 기술을 연구했다. 1894년 마르코니는 볼로냐 근처에 있는 아버지의 영지에서 간단한 도구로 실험을 시작했다.그가 사용한 도구는 전압을 높이기 위한 유도 코일로서 이에는 수신단에 있는 모르스 키로 조절되는 불꽃 방전기와 수신기에 달린 간단한 코히러(coherer:라디오파를 검출하기 위해 고안된 기구)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는 짧은 거리에서 예비실험을 한 후 코히러를 개량했다. 체계적인 실험에 의해 지상의 금속판에 연결된 기둥 위에 금속판·원통이 달린 수직 안테나를 사용해 신호전달의 범위를 증가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르코니는 신호전달의 범위를 2.4㎞까지 증가시켜 새로운 통신체계의 잠재성을 확신시켰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안테나 주변에 반사기를 설치해 복사된 전기 에너지를 모든 방향으로 퍼뜨리는 대신 빔으로 집중시키는 간단한 실험을 했다. 이탈리아에서 그의 실험이 관심을 얻지 못하자 1896년 런던으로 갔고, 그곳에서 체신부의 기사장이었던 윌리엄 프리스 경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마르코니는 1896년 6월 잉글랜드에서 최초의 특허를 신청했고, 다음해까지 일련의 성공적인 시범실험을 행했는데 어떤 실험에서는 기구와 연을 이용해서 안테나의 높이를 높게 만들었다. 그는 솔즈베리 평원에서 6.4㎞의 거리까지, 브리스톨 해협을 통과해서 거의 14.5㎞까지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이 실험들은 프리스의 강연과 함께, 잉글랜드와 해외에서 상당한 대중적 관심을 끌었다. 1897년 6월 마르코니는 라스페치아로 갔는데 여기서는 지상 무선국이 설립되고 19㎞ 거리의 이탈리아 전함과의 통신이 이루어졌다. 여전히 이 통신방법을 유용하게 응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았고 그 방법을 개발하는 데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공학기사로 활동하던 마르코니의 사촌 제임슨 데이비스가 그의 특허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주고 무선전신신호주식회사 설립을 도와주었다(1900년 마르코니무선전신주식회사로 바뀜). 처음 몇 년 동안 회사는 무선전신의 완전한 가능성을 보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99년 프랑스 위머로와 50㎞ 거리의 통신을 하기 위해 잉글랜드 사우스폴랜드에 무선국이 설립된 것은 그 다음 단계의 발전이었다. 같은 해 영국 전함들은 121㎞ 거리에서 소식을 교환했다. 1899년 9월 마르코니는 아메리카 컵 요트 경기의 진행 상황을 뉴욕 시에 있는 신문사로 보고하기 위해 2척의 미국 배에 장치를 했다. 이것이 성공하자 전세계가 열광했고 이는 미국 마르코니회사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 다음해 마르코니국제해상통신주식회사가 선박과 지상 무선국과의 교신 설비를 장치하고 작동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00년 마르코니는 무선전신 기구 개량을 위해 7777번 특허를 신청했다. 무선전신에 대한 올리버 로지 경의 초기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이 특허는 몇몇 무선국들이 간섭을 일으키지 않고 서로 다른 파장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했다. 주요발명들과 혁신 마르코니의 가장 큰 성공은 생의 후반에 가서 이루어졌다. 지구의 곡률로 인해 전기파를 사용하는 통신은 161~322㎞ 거리로 제한된다는 몇몇 유명한 수학자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마르코니는 1901년 12월 잉글랜드 콘월의 폴두로부터 대서양을 건너 전달된 신호를 뉴펀들랜드 세인트존스에서 수신하는 데 성공했다. 이 성공은 문명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큰 선풍을 일으켰다. 대기를 통해서 지구 주위로 전달되는 라디오파의 전파 법칙에 대해서는 밝혀져야 할 것이 아직도 많기는 했지만, 이는 라디오 통신, 방송, 선박 운항 등에서 그다음 50년 동안 일어나게 될 중대한 발전의 출발점이었다. 마르코니 자신은 이 발전의 많은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2년 미국 정기선 '필라델피아호'를 타고 항해하면서, 낮에는 1,125㎞ 거리로부터, 밤에는 3,200㎞ 거리로부터 오는 통신을 수신했다. 그는 라디오파가 대기 상층부에서의 반사에 의해 진행하기 때문에 때때로 낮보다 밤에 전송 조건이 더 좋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이는 낮시간에 일어나는 위방향으로의 파의 진행은 대기 하부에서 흡수되어 제한되고 이 흡수된 파는 햇빛의 영향을 받아 이온화(전기적으로 전도성을 띠게 됨)되기 때문이다. 역시 1902년 마르코니는 이 검출기에 신호가 도달하면 움직이는 철선띠에서 자기화(磁氣化)가 변화되고 이에 연결된 전화 수신기에 짤깍거리는 소리가 나게 되는 자기 검출기로 특허를 받았다. 그다음 3년 동안 그는 수평방향 지향성 안테나를 개발해 특허를 받았다. 이 두 기구들은 모두 통신체계의 효율을 향상시켰다. 1910년 그는 8,000m의 파장을 사용해, 아일랜드의 클리프턴으로부터 9,650㎞ 거리를 지나온 소식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수신했다. 2년 후 마르코니는 송신과 수신을 크게 향상시켜 장거리 무선국 설립에 이바지했다. 이렇게 효율이 증가되자 마르코니는 1918년 9월 잉글랜드로부터 오스트레일리아로 최초의 무선 소식을 보낼 수 있었다. 당시 무선통신과 그것을 해상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응용하는 일에 빠르고 광범위한 발전이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코니의 직관과 실험에 대한 충동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중 그는 보다 짧은 파장을 사용하면 안테나 주변에 반사기를 사용할 수 있어서, 적의 전송신호 도청을 최소로 만들 수 있고 신호의 세기를 증가시킬 수 있음을 알아냈다. 이탈리아에서 실험을 거친 후(반사기를 사용한 그의 최초의 실험을 한 지 20년 후) 마르코니는 영국에서의 활동을 계속했고 15m 파장에 대해서는 30~160㎞ 범위에서 신호를 받았다. 1923년 특별한 장비를 갖춘 그의 증기요트 '일레트라' 선상에서 실험을 계속했다. 콘월 폴두에 있는 1kW의 전송기로부터 2,250㎞ 거리의 신호가 수신되었다. 이 신호들은 수백배 긴 파장과 전송기의 일률이 100배인 웨일스의 카나번에서 오는 신호보다 훨씬 컸다. 이로써 단파 무선통신이 발전되기 시작했고 이는 에너지를 일정한 방향으로 집중시키기 위한 빔안테나 장치의 사용과 함께 대부분의 현대 장거리 무선통신의 기초가 되었다. 1924년 마르코니 회사는 잉글랜드와 영국령에 속한 나라들 간의 단파통신체계를 수립하는 계약을 체신부로부터 얻어냈다. 몇 년 후 마르코니는 약 0.5m의 훨씬 더 짧은 파에 대한 연구로 돌아갔다. 이렇게 짧은 파장에서는 적당한 크기의 포물선 반사기를 사용하면 원하는 방향에 대해 상당한 양의 일률이 증가된다. 요트 '일레트라'를 타고 이탈리아 해변에서 행한 실험들은 곧 저일률 전송기로 통신의 유용한 범위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32년 매우 짧은 파장을 사용하여 마르코니는 바티칸 시와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에 있는 교황궁 간의 무선전화 장치를 설치했다. 후에 마르코니는 55㎝ 정도의 짧은 라디오파라도 그 범위가 수평선까지의 범위나 전송기와 수신기 사이의 광학 거리로만 제한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마르코니는 많은 포상과 몇몇 명예학위를 받았다. 무선전신을 발전시킨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고(1909), 파리에서 열리는 평화회담에 전권대사로 파견되어 오스트리아·불가리아와 평화협정을 각각 체결했다(1919). 후작이 되었고 이탈리아 상원에 지명되었으며(1929), 왕립 이탈리아 아카데미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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